조선(대한)8경

금강산

금강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 고성군 · 통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 산의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한라산

높이 1,947.269m. 북위 40° 이남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한라산은 예로부터 부악(釜嶽)·원산(圓山)·진산(鎭山)·선산(仙山)·두무악(頭無嶽)·영주산瀛洲山)·부라산(浮羅山)·혈망봉(穴望峰)·여장군(女將軍) 등의 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으며, 전설상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한라산이라는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銀河水)를 뜻하며, 라(拏)는 맞당길나[相牽引] 혹은 잡을나[捕]로서,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다.예로부터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남쪽 하늘에 있는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었으며, 이 별을 본 사람은 장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진산이란 보통 도읍의 뒤에 위치하여 그 지방을 편안하게 지켜주는 의미를 가진다.

한라산을 진산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한반도로 밀려오는 남태평양의 큰 바람을 한라산이 막아주어 한반도의 안녕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두무악이란 머리가 없는 산을 의미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사냥꾼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잘못하여 활끝으로 천제(天帝)의 배꼽을 건드렸는데, 이에 화가 난 천제가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산정부가 던져진 곳은 지금의 산방산(山房山)이며, 뽑혀서 움푹 팬 곳은 백록담(白鹿潭)이 되었다고 한다.원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중앙이 제일 높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고, 사방 주위가 아래로 차차 낮아져 원뿔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붙여졌다. 맑은 날 해남이나 진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산 전체가 완만한 원뿔로 보인다.영주산이란 중국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한다. 바다 가운데에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 등 삼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진시황(秦始皇)은 서기 전 200년경 역사(力士) 서불(徐市)에게 그 약초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고 한다.부악이란 산정의 깊고 넓은 분화구가 연못으로 되어 있어 마치 솥[釜]에 물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연못은 성록(聖鹿)인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하여 백록담이라고 하였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4년(세조 10) 2월에 제주에서 흰 사슴을 헌납하였다[濟州獻白鹿]고 기록되어 있다.정조 연간에 간행된 읍지에 의하면, 한라산을 등산하는 데는 대정현 쪽으로 험한 산길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따라 수목 사이를 헤치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소란을 피우면 곧 운무가 사방을 덮어버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한다.

또한, 5월에도 눈이 남아 있어 얼음이 필요하면 산에 올라가서 가죽 부대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는 것으로 제주 10경 중의 하나이다.한라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조정에서 해마다 산정에서 국태민안을 비는 산제(山祭)를 지냈는데, 산제를 지내러 갔던 백성들이 동사하기도 하였다. 이에 1469년(예종 1) 목사 이약동(李約東)은 지금의 산천단(山泉壇)에 산신묘를 세우고 이곳에서 산제를 지내도록 하여 그 석단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한라산은 제주도의 전역을 지배하며, 동심원상의 등고선을 나타내어 순상화산(楯狀火山)에 속한다. 한라산은 약 360개의 측화산(側火山)과 정상부의 백록담, 해안지대의 폭포와 주상절리(柱狀節理)주 01) 등의 화산지형, 난대성기후의 희귀식물 및 고도에 따른 식생대(植生帶)의 변화 등 남국적(南國的)인 정서를 짙게 풍겨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1970년에 한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1) 지질·지형신생대 제3기 말에서 제4기에 이르는 5기(期)의 화산분출로 형성되었다. 제1기 화산분출은 기저현무암과 서귀포층을 형성하여 해저 기반을 이루며, 제2기 화산분출은 표선리 현무암과 서귀포 조면암 및 중문 조면암을 형성하여 육상지형을 이룬다.제3기 분출기는 열로분출(列爐噴出)에서 중심분출 형태로 전환되는 시기로서, 제주 현무암·하효리 현무암·법정리 조면암 등이 분출하여 한라산 화산체(火山體)가 950m에 달하였다. 제4기 화산분출은 고산 지대에 집중되어 시흥리현무암·성판악현무암·한라산현무암 등을 형성하였다.

제5기 분출기는 백록담 화산폭발로 백록담 현무암이 분출하였고 고산 지대에는 300여 개의 분석구(噴石丘)가 형성되었다.한라산 일대의 안산암(安山岩)에는 철분이 풍부한 감람석(橄欖石)이 많고, 현무암에는 알칼리 성분이 풍부하다. 이처럼 한라산체는 알칼리감람석현무암질 마그마의 분출로 이루어져 내태평양 지역에 산재하는 화산도와 비슷하다.한라산의 사면은 고도와 경사에 따라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고도 200m 이하 해안저지대는 경사도 4° 이하로 완만하며, 고도 200∼600m 사면은 중산간지대이고, 600∼1, 200m의 산악지대는 경사도 10∼20°로 다소 가파르며, 1,200m 이상의 정상부는 경사도 20°이상의 고산 지대를 이룬다. 한라산의 사면에는 약 360개의 측화산이 발달하였다.제2기 분출기에 형성된 조면암질 기생화산은 산방산·화순월라봉(和順月羅峰)·군산(軍山) 등으로 동일 구조선상에 분포하며, 수중파쇄암 기생화산은 성산봉(城山峰)·두산봉(斗山峰)·고산봉(高山峰) 등으로 해중분출지형이다.기생화산의 60%를 차지하는 분석구는 제5기 분출기에 형성되었으며 200m 이상의 사면에 분포한다.

하천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방사상 형태를 나타내며, 기반암이 불투수층인 경우 조밀하다.하천은 대체로 직류하며, 사면의 경사가 급하여 침식력이 크기 때문에 계곡이 깊고, 지반의 융기 및 해수면 변동과 관련하여 강정천(江汀川)·창고천(倉庫川) 양안에는 하안단구가 발달하였다.경사가 완만한 용암대지(熔岩臺地) 지역에는 용암동굴이 많이 분포한다. 만장굴(萬丈窟)은 길이 1만 3268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이며, 빌레못동굴은 길이 1만 1748m로 단일동굴로서는 세계 최장(最長)이다.용암동굴은 대체로 직선적·수평적이며, 용암동굴선반·용암종유·새끼구조용암 등의 미지형이 발달하였고, 2, 3층의 구조를 나타낸다.토양은 화산재·화산모래·화산력 등을 모재로 한 화산회토로서, 유기물과의 결합력이 큰 치양토(埴壤土)가 대부분이다. 이 토양은 유기물 함량과 염기 치환 용량은 높으나 염기의 흡착력이 약하고 배수가 양호하여 용탈이 심하기 때문에 작물 생장에 양호한 편은 아니다.

석굴암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해운대

백사장 길이가 1.5km, 폭 70~90m, 면적 120,000㎡로 수심이 얕고 조수의 변화가 심하지 않으며 주변에 오락시설과 부대시설이 많아 해마다 천만명이 넘는피서객이 찾아오고 있다.
또한 매년 해수욕장 개장과 어울러 각종행사와 축제가 개최되어 해운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해수욕장 입구에 들어서 있는 부산아쿠아리움을 비롯해 해운대관광안내소가 있으며 해맞이축제, 달맞이온천축제,바다축제 등 연중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다. 특히 해운대해수욕장 해변을 끼고 자리잡은 특1급 호텔들은 부산국제영화제, 2005 APEC 정상회의 등 국제 행사 경험이 풍부해 해운대 해수욕장을 세계적인 해수욕장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백사장 모래는 까칠까칠하고 깨끗하여 몸에 묻으면잘 떨어지는 특징이 있으며, 이 모래는 춘천천 하천강변으로부터 유입된 모래와 조개껍질이 오랜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쳐 다듬어진 양질의 모래이다.
한편, 해운대 해수욕장 경관조명 공사가 2005년완공되어 제10회 바다축제 개막에 맞춰 점등식과 함께 불을 밝혔다.
경관조명은 웨스턴조선호텔에서 한국콘도앞에 이르는 길이(1.6Km)의 해운대해수욕장 전 구간과 달맞이 길 일대에 설치됐으며, 연중 매일 일몰 후부터자정까지, 피서철에는 새벽2시까지 가동된다.
해운대해수욕장의 경관조명은 광장과 보행로, 주변 수목 등에 다양하게 조성되어 해변의 낭만과 아름다운 자연경관, 신비로운 조명이 어우러진 멋진 바다 분위기를 연출한다

부전고원

개마고원의 서부를 이루는 평균 1,200m 가량의 파랑상의 고원이다. 서쪽은 낭림산맥(狼林山脈), 동쪽은 부전호(赴戰湖)의 동쪽에 솟은 두운봉(頭雲峰, 2,487m)·북수백산(北水白山, 2,522m)·백산(白山, 2,379m) 등으로 이어지는 산릉 사이에 있으며, 남쪽은 부전령산맥, 북쪽은 장진강과 부전강의 합류점 북쪽에 이어져 있는 산지와의 사이에 위치한다.

다시 이 고원은 중앙을 남북으로 연화산(蓮花山, 2,355m)에서 대남산(大南山, 1,989m)을 거쳐 고대산(高大山, 1,768m)에 이르는 산지에 의하여 동·서 두 지역으로 나뉘며, 서쪽은 장진강, 동쪽은 부전강 유역이 되고 각각 장진호·부전호 등의 인공호가 축조되어 있다. 기후는 냉대기후를 이루므로 벼농사는 불가능하고, 농작물로서 밀·옥수수·메밀·귀리·감자·홉 등의 밭작물이 재배된다.

파랑상의 기복이 심하여 비교적 높고 평탄한 고원에 높은 산봉우리가 마치 섬처럼 솟아 있어서 부도(浮島)라고 불리기도 한다. 부전고원은 광활하고, 여름철에는 서늘한 기후를 이루므로 피서지로 적지이어서 광복 전에는 부전호반 등에 많은 별장·휴양소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울창한 원시림과 수력자원이다.

부전고원은 개마고원과 함께 낙엽송·분비나무·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밀림을 이루고 있다. 임산물은 장진강과 부전강을 통하여 혜산(惠山)과 신갈파진(新乫坡鎭) 등으로 수송되었고, 일부는 육로로 함흥으로 수송되었다.

부전고원은 인공호인 부전호와 무성한 침엽수림, 가파르게 솟아 있는 바위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산식물 등이 있어, 인공미와 자연미가 조화된 웅대하고 수려한 경관으로 한국팔경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개마고원쪽의 경사는 느린 반면에 동해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특수한 지형을 이용하여 유역변경식발전을 하고 있다.

1929년 부전강에 처음으로 댐을 축조하여 동해 사면의 성천강(城川江)으로 역류시켜 22만 5,950㎾의 전력을 일으켰고, 이어 장진강에 제1·2·3·4발전소가 건설되면서 32만 6,500㎾의 전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지역의 개발을 위하여 함흥에서 장진호반의 사수(泗水)까지, 오로(五老)에서 부전호반에 이르는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경사가 급하므로 인클라인(incline) 장치를 설치하여 끌어올리고 있다.

평양

대동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중화군에 접하고 있다. 4,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로서 단군왕검이 도읍한 이래 기자조선·위만조선·낙랑·고구려 등의 도읍지였으며, 옛 이름으로는 왕검성(王儉城)·기성(箕城)·낙랑(樂浪)·서경(西京)·호경(鎬京)·유경(柳京) 등이다. 동경 125°43′∼ 125°45′, 북위 38°59′∼ 39°02′에 위치하며, 면적 92.5㎢, 인구 약 40만 명(1943년 당시)이다.

이 지역에서는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1966년에 발굴, 조사된 상원군 검은모루유적지에서는 약 60만∼4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짐승뼈화석과 석기류가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청정암동굴에서도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된 바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에 이어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더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곳만 해도 미림리·오야동·토성동·사동·석암동·청호동·반교리·서포·금탄리·입석리 등 10여 군데 이상이 된다. 1959년에 발굴된 미림리 유적지에서는 상층부에서 즐문토기와 철기가, 하층부에서 무문토기와 석부·반율석도·방추차 등이 출토됨으로써 이 지역 신석기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고조선의 유적으로는 평천리의 기자정전지(箕子井田址)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 역사성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에 걸친 이 지역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토성동토성과 정백동의 고분군을 들 수 있다. 토성동토성은 방형의 구조에 성벽 한 변의 길이가 200m를 훨씬 넘는데, 토성의 안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정백동의 고분군에서는 여러 종류의 청동제 그릇과 금동유물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당시의 청동주조술과 금속공예술의 탁월한 기법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정백동 이외에도 미림리·석암동 등지의 고분에서 당시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풍부하게 발견된 바 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은 통구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류지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대동강 유역의 고분은 화려한 벽화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용강·강서·안악 등지의 고분벽화는 회화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며, 평양 시내에서도 사신도를 주로 그린 무진리고분 등이 발견되었다.

이곳에 고구려의 왕궁·성터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동천왕 때의 일이다. 이때에 지금의 을밀대(乙密臺)와 만수대(萬壽臺)를 포함한 성벽을 이루고, 대동강변의 기린굴(麒麟窟) 부근의 영명사 남쪽에 구제궁(九梯宮)이라는 이궁(離宮)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금은 유허만이 남아 있지만 일설에 구제궁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왕궁이요, 기린굴은 동명왕이 기린을 사육하던 굴이라고 전하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 있는 대성산성·장안성 등은 고구려 성곽의 대표적인 유적들이다. 대성산성은 성벽의 길이나 그 규모면에서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장안성은 552년에 축조된 것으로 지금의 평양 외성(外城)과 그 북쪽의 동천왕대에 건조되었던 구 평양성을 합하여 이루어졌다. 장안성의 내부는 田자형으로 구획을 정리하고 자갈로 도로를 정비하여 놓는 등의 정제된 형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평양성에서는 고구려 당시의 축조사실을 알게 해 주는 이두체 명석(銘石)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왕궁인 장안궁은 창광산 동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원래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할 때의 왕궁은 대성산 남쪽 기슭에 있는 안학궁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허만 남아 있다.

광개토왕이 이 지역을 중시하면서 영명사를 비롯한 아홉 개의 사찰을 지었다. 영명사는 한때 아도(阿道)가 주석하였던 고찰로, 원래는 기린굴 위쪽에 있었던 것을 1109년(예종 4)에 기린굴 아래로 이전하였으며 부벽루(浮碧樓)는 원래 영명사 범종루(梵鐘樓)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영명사에 승장(僧將)을 두고 승군을 통솔하게 하면서 따로 총섭(總攝)을 두어 평안도의 사원과 승려를 총괄하게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병화로 소실되고 오직 칠성당(七星堂)과 팔각오층탑, 그리고 돌사자 등이 남아 있다.

497년(문자왕 6) 창건되었던 금강사(金剛寺)에는 거대한 팔각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절터에서 막새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부벽루 앞 대동강 건너편인 동대원리에도 1만여 평에 달하는 대왕사(大王寺) 사지가 있으나 역시 기와조각 등만이 발견될 뿐이고, 대성산 국사봉 기슭에서 발견된 2개의 금동불상은 고구려 조각기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고려시대의 서경(西京)으로 중시되었던 이 지역에는 비교적 고려의 유적이 많은 편이다. 922년(태조 5)부터 평양 중성(中城)으로 일컬어지는 재성(在城)이 축조되기 시작하였고, 938년에는 뒤에 외성(外城)으로 일컬어지는 나성(羅城)이 축조되었는데, 고려시대의 평양성이라 함은 바로 이 재성과 나성을 합한 것으로 그 주위가 40여 리에 달한다.

성종 때 서경성을 수축하면서 대동문(大同門)·보통문(普通門)·경창문(景昌門)·칠성문(七星門)·함구문(含毬門)·정양문(正陽門) 등의 여섯 대문을 건설하였다. 대동강변의 명소인 부벽루는 원래 고구려 때 남헌흥상인(南軒興上人)이 지은 영명루(永明樓)인데, 예종 때 이것을 수축하고 부벽루라 개칭하였다.

대동문은 서경성의 동문(東門)으로 조선 초기에 개축되고 다시 1575년(선조 8)에 수축된 3층 누문이며 평양의 대표적 고건축물이다. 영명사에 전하여지는 팔각오층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나부사에 있는 육각칠층탑도 이때에 만들어진 불교유물이다. 한편,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과 기자 사당인 숭인전, 그리고 기자묘 등은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되었던 유적들이다.

조선의 태종·성종대에는 고려시대의 재성인 평양 본성을 수축하였고, 병자호란 후인 인조 때 국방강화를 위하여 평양 내성을 쌓기 시작하여 1685년(숙종 11)에 완성하였다. 을밀대 서북에서 모란봉을 둘러싸고 있는 평양 북성은 1714년에 축성하였는데 전금문(轉錦門)이 동문이고 현무문(玄武門)은 서문이다.

만수대의 영숭전(永崇殿)은 태조이성계(李成桂)의 화상을 모신 사당이다. 또한, 을밀대 북쪽의 민충단(愍忠壇)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명나라 장병을 제사지내는 사당이고, 서문 밖의 무열사(武烈祠)는 명나라 상서(尙書)이던 석성(石星)과 이여송(李如松)을 제사하는 사당이다. 관풍동의 의열사(義烈祠)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기(義妓) 계월향(桂月香)의 사당이다.

서원으로는 용곡서원(龍谷書院)·서산서원(西山書院)·창강서원(蒼岡書院)·소현서원(紹賢書院) 등이 있었으나 거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 상태이다. 대동강가 덕암(德巖) 위에 있는 연광정(鍊光亭)은 중종 때 건립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된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경승지로는 능라도·청류벽(淸流壁)·모란봉·을밀대 등이 있다. 양각도 부근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사건이 발생하였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채관리에는 백선행기념관이 있다. 「李元淳」

[백선행기념관白善行紀念館]

채관리에 있는 기념관. 이 기념관은 백선행이 일생 동안 아껴 모은 돈을 희사하여 건립한 공회당이며, 그녀의 이름을 따서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였다. 본래 건립되어 있던 평양부립공회당이 일제의 전용물이 되어 분노의 대상이 되자, 이에 맞서 조만식(曺晩植)의 건의에 따라 그 뜻을 받아들여 석조 이층양식으로 건립되었다.

구조는 1층은 사무실과 도서실, 2층은 약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으로 되어 있다. 기념관 전면에는 백선행의 상반신 동상이 있으며, 비문은 양주동(梁柱東)이 지었다. 그 밖에 최은희(崔恩喜)가 지은 백선행의 일대기와, 숭현여학교에 건립된 백선행여사기념비문 등이 있다.

백두산

함경남도·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滿洲)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

백두산의 이름은 먼 옛날부터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고 이름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라고 기재되어 있다. ‘불함’에 대하여 최남선(崔南善)은 ‘ᄇᆞᆰᄋᆞᆫ’의 역음으로 보고 그 뜻을 천주(天主)인 신명(神明)으로 해석했다. 또한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불이간(不爾干)’, 곧 신무(神巫)의 뜻으로 보아 백두산에 신이 있다는 데서 연원한 것으로 보았다. 양측의 해석이 모두 ‘신(神)’으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한대(漢代)에는 백두산을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남북조의 위(魏)시대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하였고 또는 ‘도태산(徒太山)·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북사(北史)》에 “말갈국 남쪽에 종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라 하며, 세상사람들은 이 산을 받들어 모셨다. 사람들은 산상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용변을 본 뒤 그릇에 담아갔다. 산에는 곰·범·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위서(魏書)》와 《수서(隋書)》에 모두 도태산(徒太山)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북사》의 종태산(從太山)은 도태산의 오자일 것이다. 당나라 때는 태백산이라 불렀고, 금(金)나라 때에 이르러 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우리 나라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조에 백두산을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의 광종 10년조에 “압록강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 쪽에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백두산의 명칭은 불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백두산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한대 이후 불리어진 명칭의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백(白)을 굳이 ‘ᄇᆞᆰ’의 차음(借音)으로 보고 있으나, 백두산의 모습으로 보아 그대로 백(白)자 자체의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두산 산정은 거의 사계절 동안 백설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산정부는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雪〕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이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開國)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었다.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천지(天池)를 비롯한 절경이 많은 데다가 독특한 생태적 환경과 풍부한 삼림자원이 있어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는 산이다.

압록강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과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과의 국경을 이루는 국제 하천으로, 혜산·중강진·만포·신의주 등을 거쳐 용암포의 초하류(稍下流)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은 허천강·장진강·부전강·자성강·독로강·충만강·삼교천을 비롯하여 100㎞를 넘는 여러 하천들과 수많은 지류로 형성되어 있다.

이 강은 직선거리로는 400㎞정도이나 상류 쪽에서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2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으로, 강의 길이는 803.3㎞이고, 유역 면적은 3만 1,226㎢이며, 가항 거리는 698㎞이다.